2008년 08월 16일
즐거운 아이러니

한겨례신문에서 영어교육에 목을 메는 한국 사회에 대해서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과 인터뷰한 기사 “한국 사회는 좀 미친 것 같다”를 봤다.

다들 목적의식도 없고 실제적인 경쟁력도 없는데 불필요하게 영어공부에만 투자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

그런데 기사의 마지막 부분에 붙어있는 몇줄의 광고.














ㅋㅋㅋㅋㅋ




by duddnek | 2008/08/16 01:12 | 가치있는 사유 | 트랙백 | 덧글(0)
2008년 08월 15일
분노
-080515
글의 제목을 분노로 정해놓고 쓰기 시작한다. 분노는 존재한다. 분노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분노의 방향이 명확하다면 폭력을 발생시키지 않는 선에서 표출시켜야 한다. 안에서 터진 분노는 돌이킬 수 없다. 찢어진 것이 아니라 분열되어 버린 세포는 제거해버리는 방법밖에는 없다. 그러니까 이 글은 분열되지 않기 위한 절규, 극도로 소극적인 자기방어이다. 생명체는 생존을 지향한다.

문제는 수용해서는 안 될 것을 한번 수용하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수용하고 있다는 것조차 지각하지 못하고 수용하게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는 의지 없이 발생하는 현상이다. 사람은 많은 것을 의식 하지 못한 채 행한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불편한 것들에 의식을 개입하면서 넘어지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는 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편한 것을 의식 밖으로 밀어냄으로서 견고하게 서있을 수 있다.

최초의 수용은 무엇이었나. 벌써 더듬어야 한다. 그리고 머릿속에 혼재되어 있는 질척한 덩어리를 분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기억들은 그렇게 한데 뭉쳐진다. 빨간색 고무찰흙과 파란색 고무찰흙을 한데 뭉쳐놓고 나면 둘을 도로 나눠놓기가 힘들어 결국 하나의 덩어리로 밖에 볼 수 없게 되는 것처럼 끈적한 기억들은 지들끼리 멋대로 뭉쳐져서는 함부로 속에서 지워져간다. 그런 식으로 자신들의 독립된 기억들을 인정하지 못하도록 한다.

논문. 석사 학위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은 석사에 해당하는 학문적 지식과 연구를 진행시킬 수 있는 능력에 의해 판단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합당한 것을 고통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 권위 앞에 주눅 들면서도 자존심을 지켜낼 수 있는 능력, 더러운 것들을 고스란히 내 속에 삽입 시키고도 과거 후배들에게 올바르게 살아가자고 외쳤던 기억을 쪽팔려하지 않을 수 있는 단단한 내적 방어능력의 정도로 판별된다. 불행하게도, 나는 아직 저런 능력들을 충분히 습득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님’자 하나 만으로는 떠받들기가 턱없이 부족한 교수님님에게 그 동한 공부한 것에 대한 평가와 가르침을 청하는 것은 감히 상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건방지게 순진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감히 교수님님님의 면전에 어설픈 학습의 흔적 따위를 들이미는 나와 같은 사람은, 아직도 분위기 파악하나 제대로 못하는 애송이쯤으로 평가받게 된다. 나는 며칠간의 서러움 끝에 이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지도교수에게 지도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도교수는 지도교수지 학문을 지도해주는 교수는 아니다. 그러므로 지도교수에게 학문을 지도받을 기회를 박탈당하고, 지도교수님님의 경력과 주머니를 채워줄 프로젝트를 달성하기 위해 생활의 대부분을 헌납하고, 간신히 일주일에 몇 번 마주치면 님의 얼굴에 미소가 머물만한 애교스런 농담을 뱉어내게 되는 것 등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해야 된다. 그러니까 논문을 쓰기 시작해야 할 3학기, 4학기 동안 교수가 연구년이라 어떠한 정규수업도 받지 못하고, 빈도 높은 결강을 자랑하는 대타 교수의 격주 수업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석사과정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을 억울해 하는 나 같은 사람은, 주어진 상황을 비관적로만 바라보는 좀 꼬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는 며칠간의 혼란 끝에 이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규칙이라는 것은 언제나 권력자의 손 안에서 제작되고 수정될 수 있다. 규칙은 권력자들이 피지배자들의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려는 목적으로 그럴듯한 포장지를 살짝 덮은 상한 우유 같은 것이다.
+080815
본래 석사 학위의 평가 기준인 이수 학점, 종합시험, 영어시험, 졸업논문발표의 일정은 학칙으로 정해져있다. 학생들은 이런 학칙을 판단기준으로삼아 석사과정 동안의 생활을 예상해보고 가능하겠다는 판단이 서면 거한 등록금을 헌납한다. 그러나 이런 학칙은 학생들의 질적인 공부과정을 염려하는 교수님님들에 의해서 비공식적으로 친히 수정되어진다. 그것도 등록금 헌납 이전이 아니라 헌납 하고도 1년 이상이 지나 들였던 헌납금이 아까워서라도 과정을 그만둘 수 없는 학생들에게, 다음 학기 논문 프로포잘을 준비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이런 새로운 규칙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정보가 뜬금없이 통보된다. 그것도 교수와 학생이 모인 자리에서 구두로 통보받는 것이 아니라 연구실 복도 게시판에 떡하니 붙은 A4용지 한 장을 통해서이다. 복도 게시판에 붙은 그 고결한 A4용지에 따르면 학칙에 정해진 학점보다 더 많은 학점을 이수해야만 석사과정을 마칠 자격이 주어지며, 학칙에 따라 3학기 이후로 순서에 관계없이 석사과정 내에 종합시험과 영어시험 통과하고 졸업논문을 발표 하면 석사 이수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종합시험과 영어시험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들은 논문 프로포잘을 할 기회가 아예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영어시험이나 종합시험에 합격하지 못했지만 4학기 때의 재시험에 합격하기로 하고 지금은 우선 논문 프로포잘을 열심히 준비해오던 학생들은 그 순간부터 잡고 있던 논문들을 내려놓게 된다.

나는 이런 비공식적인 내규, 그리고 그것이 석사 과정 등록 한참 후에 이루어지고 갑작스럽게 일방적으로 통보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모르고 같은 처지에 놓인 학생들에게 쌍시옷이 섞인 소리를 목 놓아 뱉어냈다. 그러고는 같은 처지의 학생으로부터 ‘사실 기존의 규정이 석사의 기준을 갖춘 사람을 선별해 내지 못하지 않는가, 이런 규정이라도 있어야 학생들이 더 열심히 공부하지 않겠는가’ 하는 소리를 듣는다.

이제 받아들이는 적응자와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적응자로 모든 인간의 종류가 분류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후에 저런 비공식적인 내규가 학생들이 4학기 만에 학위과정을 마치고 학교를 졸업하면 교수님님들의 개인적인 프로젝트를 무급으로 도와줄 수 있는 경험있는 인력들을 놓치게 되는 것이라는 계산에 의해 학생들을 더 학교에 메어두기 위해 마련된 것이라는 나의 예상이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는데도 이제는 그런거지 뭐 하고 고통스럽지 조차 않게 되었다.

좆같은 건 좆같은 거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입 더러워지는게 싫어서 좆같은걸 보고도 눈감으면 어느 순간 나도 좆같아진다. 그러나 그건 나 혼자 하는 거다. 일단 입 밖으로 내놓고 나면 입 더러운 놈, 적응 못하는 놈, 삐뚤어진 놈으로 찍히기 밖에 안 된다. 혹시 최고 권력자이신 교수님님들 귀에라도 들어가면 학위여 안녕 헌납금이여 잘 가라다. 그러니까 미치지 않은 채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집안 한구석에 ‘야이 씨발새끼들아 그따위로 살지마라. 아니다, 씨발 그냥 그따위로 살다 죽어라 좆같은 새끼들!’ 하고 외칠 수 있는 구멍을 파두어야만 한다. 물론 아무도 들을 수 없도록 깊게 깊게.
by duddnek | 2008/08/15 18:45 | 가치있는 사유 | 트랙백 | 덧글(2)
2008년 0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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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uddnek | 2008/08/15 18:44 | 가치있는 사유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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